강구인 칼럼

올 초에 그간 열심히 근무했던 공직에서 명퇴하고, 그 간 갈구(渴求)했던 동양학 공부를 제대로 하고자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스승님들을 찾아 수강하고 있다. 장자, 논어, 훈민정음, 주역 등, 내가 강의전선에 나가고자 했던 부문을, 아직까지는 독학으로는 일천하다 생각되는 부분의 경험과 기술을 충전하기 위하여, 스승을 모시고 수강하니 이해가 열배는 아니더라도 두 배는 빠르게 되는 듯하다. 옛말에, 학문에는 좋은 스승과 좋은 책이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논리를 실전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께서 가장 아꼈다는 제자 안회(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자공(子貢)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안다.’라는 구절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나는 72명이라는 공자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뒤쳐진 제자들 측이라도 흉내 내고 싶은데, 그저 내 바람으로 그칠 듯 요원해 보인다. 배우면 배울수록 왜 그리 배울 것이 많은지.

예전부터 수차례 읽고 읊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논어 첫 구절인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말이 있다.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적시에 익히면, 또한 재미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그전엔 그저 논어의 한 구절로 여겨지던 것이 이번에 스승을 모시고 강독을 나누면서,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논하면서, 나름대로의 희열을 독백(獨白)속에 묻곤 한다. 여태껏 사회 조직생활 속에서 남을 위한다는 爲人之學을 하던 터에, 이제야 나를 자성(自省)으로 끌어 들이는 爲己之學의 묘미를 알아 가며, 자아철학을 서서히 발견하고 있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에 나오는 ‘나의 진정한 스승은 누구인가?’ 바로 나였던 것을 환갑이 되서야 알다니, 한심하기도 하면서도 좋기만 한 이유는 뭐일까?

이어지는 논어구절은 ‘벗이 있어 멀리서도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다. 맞는 것 같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사회인이라는 범주 속에서 동창이나 고향친구들과의 만남에 제약을 당연시 하곤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로 대변하기도 했었다. 벗이라는 한자에 붕우(朋友)가 있다. 友는 상형문자로 보면 두 손을 표시하여 사회적인 사귐에서 ‘나는 손에 무기가 없소’하고 악수하는 모양이요, 朋은 그 옛날 조가비가 화폐기능을 할 때 두 줄에 엮인 어쩔 수 없는 조가비꾸러미(엽전꾸러미) 형상이다. 다시 말해 朋은 자기의지와는 상관없는 인연이요, 友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사회 계약의 소산이다. 모든 생명체의 회귀본능을 대변하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논하자면 朋들의 세계를 찾게 된다. 내 또한 느낀다. 별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거의 매주 아니 갈 수 없는 동창들과의 山行, 힘들다 하면서도 朋의 의미를 알기에 그저 같이 해주니 피차 不亦樂乎더라. 초교, 고교, 대학동창들, 내 의지대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기에, 그 간 핑계를 치워두고 같이 하니 有朋의 의미가 더해짐을 나는 느끼게 된다. 같이 하는 다른 친구들도 그리 느낄는지는 모르지만.

이어진 마지막 구절이 더 나의 공부욕(工夫慾)을을 자극한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君子가 아니겠는가?(人不之而不慍不亦君子乎)’ 그렇다. 사회생활에서는 더구나 계층적인 조직사회에서는 남의 눈에 띄도록 튀는 행동을 하든가, 아니면 출중한 능력이 절실하다. 능력이 안 되면 젖 달라고 막 울기라도 해야 하는 것 같다.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다가는 스트레스가 먼저 알고 찾아오는 세상이다. 논어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는 난세라는 공자님 시절, 춘추전국의 자포자기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인공지능 시대인 현시대는 문명적으로는 급속히 발전하는데 인간의 일자리문제는 반비례가 극대화 되어가니 공자님 시대나 요즘이나 고민의 시대이기는 매 한가지인 듯하다. 퇴직이라는 허울을 쓰고는, 공자님 마음인양, 금방이라도 부화(孵化)한 신선한 君子인 듯 착각으로 일변한다.

용인시청엔 필연(筆緣/붓으로 맺은 인연)이라는 알찬 서예동아리가 있는데, 재직시절을 생각하며, 얼마 전 그 동아리 회원들과 문화탐방을 다녀왔다. 일정 중에, 때마침 내 공부와도 궤도를 같이하는, 퇴계(退溪)선생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 간 풍수지리 공부를 하면서 인근 서원이나 향교들을 탐방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엄숙함이 서린 곳이었다. 우리 성리학의 대가이신 선생의 발자취를 보듬으면서, 범접하지 못할, 그 분의 생활이 내가 위에 언급한 논어 학이(學而)편 내용에 어찌나 그리 합당한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누가 공자이고 누가 퇴계인지 헷갈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니 두 분이 다 그렇게 존경을 받으시리라. 수차례 벼슬길을 마다하시고 학문에 정진하셨다니, 진정한 爲己之學人이셨다고 생각된다. 내친김에 선생께서 어리신 선조임금께 바쳤다는 ‘유학의 정치(精致)인 성학십도 모사본을 구입해 오면서 다짐 또 다짐했다. 올 서예작품전에는 기필코 성학십도 병풍 작업을 해가며, 공자님과 선생처럼 진정한 ‘내 학문(爲己之學)’을 조금이라도 깨달아 보겠노라고. 그러다보면 나도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 포정(庖丁)의 경지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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