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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보민이왕(保民而王)-"백성을 보호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기사승인 2019.03.13  19: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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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편집위원

“백성을 보호할 줄 알아야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좌전(左傳)에 나오는 민유방본(民惟邦本-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다)이란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백성(民)’의 소중함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이 말은 ‘맹자’ ‘양혜왕(梁惠王)‧上’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기원전 770~480년)에서 전국시대(기원전 480~222년)로 넘어갈 무렵, 중원의 열국은 이미 전면적인 봉건사회로 진입했고 그에 따른 생산 관계의 극렬한 변화는 의식 형태의 전환을 가져왔다. 지배자들은 백성의 지위와 동향을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해줄 수 있는 관건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좌전’만 해도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의 사상이 여러 곳에 반영되어 있다. 맹자는 더욱 확실하게 “백성이 가장 귀중하며 사직은 그 다음이고 이에 비하면 군주는 오히려 가볍다”는 인식하에서 통치자들이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을 보호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길 바랐다.

‘전국책’ ‘조책(趙策)’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왕 왕건(王建)이 사자를 조나라로 보내 위후(威后)에게 문안편지를 올렸다. 그러자 위후는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먼저 물었다. 

“금년에 흉년은 들지 않았는가? 백성들은 모두 별 탈 없는가? 왕도 역시 안녕하신가?”

사신은 약간 불쾌해 하며 대꾸했다.

“제가 우리 왕의 사명을 띠고 왕후께 왔는데, 우리 왕의 안부는 묻지 않으시고 먼저 곡식과 백성을 물으시니 어찌 천한 것을 물으시고 귀한 것은 뒤로 미루십니까?”

위후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만약 흉년이 든다면 어찌 백성이 있겠으며, 또 백성이 없다면 어떻게 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럴진대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취하는 물음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조나라 위후는 백성이 없으면 군주도 없으므로 백성이 근본이라는 사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는 군주를 귀하게 여기고 백성을 천하게 여기는 사상과는 상반된다. 위후는 또 왕이 “백성을 기르고 그들을 편히 쉬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민생과 민심에 유익한 현자를 중용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하지 않고서“어떻게 제나라 임금으로 떳떳하게 행세를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맹자는 ‘백성이 중하고 군자는 오히려 가볍다’는 ‘인정(仁政)’ 사상을 제기하면서 ‘인화(人和)’야말로 승리를 얻는 근본이라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토의 경계가 분명하다고 해서 백성들이 나라 안에 사는 것이 아니고, 산이나 골짜기가 험하다고 해서 나라의 방위가 견고한 것이 아니며, 무장이 예리하다고 해서 천하에 위세를 덜치는 것이 아니다. 정도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고, 정도를 잃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적다. 도와주는 사람이 적으면 친척한테도 배반당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온 천하가 따른다. 온 천하가 따르는 힘으로 친척에게 마저 배반당하는 사람을 공격하기 때문에, 군자는 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맹자’ ‘공손추‧下’.)
‘손자병법’의 첫머리에 “다섯 가지 요건, ‘5사(五事)‘을 기본으로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5사’의 첫 번째가 바로 ‘도(道)’다. 손자가 말하는 ‘도’란 “백성으로 하여금 윗사람과 한마음이 되게 하는 길이다.” 그 뜻 역시 백성과 통치자의 의견 일치에 두어져 있다. 이렇게 보면 ‘보민위왕’은 국가의 운명과 관계되는 대전략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보민’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민의 지위는 그 어느 것보다 높다’는 말과 같을 수는 없지만, 옛날 군사 전략가나 정치 전략가들이 민중을 승리를 가져다주는 근본으로 인식했다는 것만 해도 대단히 진보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왕조의 멸망은 민심의 이탈과 밀접하다. 주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망간 후 시작된 동주시대에 열국은 서로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었다. 제나라 환공, 진(晉)나라 문공, 진(秦)나라 목공, 초나라 장공. 오나라 부차, 월나라 구천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 지역 또는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그들이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한결같이 민중의 신임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는 데 있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봉건사회 전반기 역사 발전의 최고봉을 이루었는데, 그 발전상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물론 당나라 이전까지의 그 어떤 왕조와도 비할 수 없었다. 역사의 동인으로 보아 유방은 ‘무도한 자를 정벌하고 포악한 진나라를 친다.’는 시대적 사명에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진나라가 왜 망했는가를 거울삼아 민생을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여, 그 뒤에 등장한 많은 봉건 왕조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당나라 초기의 강성함은 당 태종이 취한 정책과 직결되는데, 태종은 청렴한 관리를 등용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했으며, 세금을 줄이고 민중이 편히 생업에 종사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균전제(均田制)라는 토지 제도를 시행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널리 시행하였다.

역사를 보면 ‘보민위왕’이야말로 통치술 중에서도 귀한 보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심을 얻는 자 천하를 얻을 것이요, 민심을 잃은 자 천하를 잃을 것이다’는 말은 현명한 제왕과 장수 그리고 재상들이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만민의 천하다. 만민의 이익을 함께하는 자는 천하를 얻고, 만민의 이익을 혼자만 차지하려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현명하고 덕이 있는 통치자는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부역을 매우 적게 하므로 만백성이 부유해져 굶주리고 추워하지 않으며, 통치자를 해와 달처럼 받들고 부모처럼 가깝게 여긴다.”는 말을 늘 염두에 둔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오로지 백성을 아끼는 것이다.

일간경기 ilgangg@naver.com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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