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좋은 말 속에 감춘 중상모략

이정랑 편집위원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는 중상모략이다.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남을 헐뜯는 것이 중상이다.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미는 것이 모략이다. 이 모두 눈앞의 이익을 위한 야비한 짓이며 파렴치한 행동이다. 특히나 우리 정치판이나 법조계 언론계가 그렇다.”

‘중상모략 中傷謀略’이라고 말할 때 ‘중상’은 꼭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나쁘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중상을 ‘폄우포중 貶寓褒中’이라고 한다. 이 방법은 상대에게 죄를 짓지 않아도 되고 때로는 고맙다는 말까지 들을 수 있다.

한비자의 내저설(內儲說)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중산국(中山國)에 지위가 낮은 공자 하나가 있었다. 그가 타고 다니는 수레는 아주 낡은 고물이었고, 수레를 끄는 말들도 볼품없이 비쩍 말라 있었다. 임금의 측근 중에 그 공자와 사이가 나쁜 신하가 있었는데, 이자가 임금에게 그를 도와주자고 청을 드렸다.

“그 공자께서는 몹시 궁색하여 말에게 먹일 사료조차 없어 야윈 말을 끌고 다니는데, 주군께서 그분에게 사료라도 조금 내려주시지 그럽니까?”

그러나 임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그 신하는 사람을 시켜 야밤에 몰래 사료를 저장해 놓은 창고에 불을 지르게 했다. 임금은 이것이 공자의 소행이라 여기고 그를 잡아다 죽여 버렸다.

‘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나라 제9대 황제 경제(景帝)의 황후가 왕자를 낳지 못해 지위가 떨어졌다. 누가 그녀의 뒤를 이어 황후가 될 것인가가 후궁들 사이에서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후궁 중 율희(栗姬)가 가장 먼저 왕자를 낳았다. 관례대로라면 장남이 황태자가 되고 생모인 율희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율희는 시기와 질투심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 이를 알게 된 황제도 자연히 그녀를 멀리했다. 그런데도 율희는 이런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고 왕자를 낳았다는 사실에만 집착해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경제가 율희에게 장차 다른 후궁들에게서도 왕자를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매우 불쾌해 하며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언행도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경제는 더욱 그녀에게 혐오를 느꼈다. 그러나 황태자의 생모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궁중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낌새를 눈치 챈 왕부인(王夫人)은 경제의 측근 대신에게 슬며시 이런 말을 흘렸다.

“황후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예요. 내가 황상께 말씀드려 태자의 생모 율희를 황후로 삼도록 권해볼 참인데 경의 의견은 어떤가요?”

왕부인은 율희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희가 황후가 되도록 도우려 한다니, 이 어찌 개인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큰 뜻이 아니겠는가? 그 대신은 감동했거나 아니면 자기가 ‘율황후’의 첫 추천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곧장 황제에게 달려가 아뢰었다.

“태자의 모친이 일반 부인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 황후로 책봉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이 말을 들은 경제는 깜짝 놀라며 의아해 했다.

“경이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율희를 궁 밖으로 내쫓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차에, 그런 여자를 황후로 삼자고 했으니 황제는 버럭 화를 내면서 지체 없이 그 대신을 감옥에 가두게 하는 동시에 황태자를 폐위시켜버렸다. 그러자 율희는 ‘갈수록 원망과 절망에 사무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왕부인은 황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아들은 황태자가 되었으니, 이가 바로 유명한 한 무제(武帝)다.

왕부인이 율희를 황후로 삼자고 부추긴 것이 황제의 화를 돋웠으니, 이는 그녀의 치밀한 안배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왕부인이 율희에 대해 나쁜 말을 했더라면 사태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좋은 말로 추천하는 방식을 통해 직접적인 중상모략 이상의 효과를 거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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