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문 성남시 분당구 이매2동장

탄천에 가을이 불어온다, 향기를 가득 품은 가을이 익어간다. 성남의 젓줄인 탄천은 용인시계부터 서울시와 맞닿은 곳까지 성남시 구간이 16km이다. 가는데 4시간 왕복이면 8시간, 도시락 둘러메고 간식보따리 얹어 탄천 양안을 둘러보는데 하루면 족할 거리이다. 이 가을 훈훈한 향기와 함께 선선한 바람 맞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성남 사람이라면.

수년전 용인시계인 구미동 집 앞에서 성남시청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8월 중순 더위가 한창이던 때에 을지연습 야간근무를 하기 위해서 대중교통이 잠자던 시간이니 ‘걸어보리라!’ 다짐하고 자정이 넘어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올해처럼 폭염은 아니었던지라 걸을만했다. 늘 다니던 정자동 신기교 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더욱이 경관조명이 색깔 옷을 바꿔가며 반겨주니 눈이 즐거웠고 백궁교 아래는 터널 속을 걷는 것처럼 색다른 느낌이 좋았다. 백현교를 지나 파크 골프장에 다다라서는 내 앞서서 걷던 여성이 가다 말고 다시 돌아 오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손을 가리킨다. 흠칫 보니 달빛에 반짝거리는 것이 있는데 너구리의 두 눈이 길섶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다. 깜짝 놀라 일단 후퇴했다가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좀 더 가까이 갔는데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하다. 얼른 지나치려다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제 녀석이 무슨 모델인 양 그러하다.

밤길을 걸으며 탄천이 부러워 졌다. 내가 늘 산책 나오는 이른 새벽에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건강한 발걸음이 무수히 많았는데 자정이 넘은 그 시간에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밤중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니 탄천은 밤사이에 젊음을 만끽하는 걸까? 분당구청 앞 분당천 합류 지점을 지날 때부터는 조금 피로해졌고 성남~여주간 복선전철인 경강선 공사로 어지럽던 이매교 주변을 지날 때에는 제대로 난 길을 찾아 빙빙 돌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은 잘 정비되어 있다. 그렇게 밤사이 탄천은 나와 노닐며 즐거움을 주었다. 그 해 가을빛이 무르익는 좋은 날에 선선한 바람 맞으며 탄천과 노닐려던 나의 계획은 이루지 못했다.

오랜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옛적에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염라대왕 앞에 가게 되었다. 잘못 데리고 온 것을 안 염라대왕은 저승사자에게 다시 데려다 주라고 호통을 쳤고 동방삭은 자신의 수명이 궁금해서 몰래 명부를 들쳤는데 고작 일갑자였다. 동방삭은 몰래 붓으로 획을 더 하여 삼천갑자로 고치고는 이승으로 다시 환생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염라대왕이 동방삭을 잡아 오라고 저승사자를 보냈지만, 그때마다 동방삭은 잘도 피해 다녔다. 이에 염라대왕은 직접 팔을 걷어부쳐 궁금증이 많은 동방삭을 잡기위한 계책을 마련하고 최측근인 제1사자를 파견했다. 사자는 염라대왕의 지시대로 탄천에 앉아 숯을 씻었고 부근을 지나가던 동방삭은 왜 숯을 물에 씻는지 물었다. 사자가 ‘숯이 희어지게 하려고 한다.’ 하니 동방삭은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씻어 희게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므로 사자는 그를 생포하였다. 염라대왕에게 데려가니 마침내 동방삭의 생명이 끝났다. 이 설화에서 말하는 탄천이 바로 저승사자가 숯을 씻던 냇가이며 오늘날 성남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숯내 곧 탄천이다. 인근에는 예전에 숯을 구웠던 곳이라서 ‘숯골’이라고 불리던 탄리, 지금의 태평동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그 옛날 동방삭이 놀던 곳이 바로 이 탄천 맞다. 각설하고.

올여름 폭염에 지친 터라 언제 가을이 올까 기다렸는데 부리나케 다가왔고 어느새 지나쳐 가겠지만 그윽하게 풍기는 향내는 그 어느 때 보다 진하다. 몇 년 전 그 때처럼 기다리던 가을이 왔고 겨울이 오기전에 향기로운 가을을 느끼며 탄천을 걸어야겠다. 아침에도 좋고 밤이라도 좋다. 성남의 젖줄 탄천과 함께라면. 더욱이 성남시민 이라면.

이 가을 탄천에 향기로운 바람이 분다. 그 향기 가득, 세상 곳곳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그 옛날 삼천갑자 동방삭이 머물던 자리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가 만방에 나아가기를…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