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눈물을 떨구면서 장수왕의 발에 엎드려 정례했는데

옛날 구살라국에 장수왕이란 임금이 있었다. 매우 마음이 어질어 오로지 자비와 인의로써 선정을 베풀어 나라는 평안하고 백성은 번영하여 위아래가 한결같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 때 이웃 가사국에는 범예왕이 있었는데 몹시 간탄하여 간악한 정치를 베풀었으므로 국운은 날로 피패하고 백성들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래 그는 자기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이웃나라 구살라국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여 틈만 있으면 언제고 공격하여 국토와 재산을 빼앗으려 꿈꾸고 있었다. 

왕은 생각했다.

"언제고 저 나라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이 몸이 죽어 다른 몸을 얻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죽든지 살든지 한번 겨루어 보리라." 하고 곧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장군들은 반대했다."군대는 있으나 군비가 없고 적은 적으나 지용(智勇)이 뛰어나 있습니다. 전쟁이란 반드시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쳐들어간다면 하늘을 욕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나라에는 많은 국토와 인민과 재산이있다. 군비는 그것을 빼앗으면 되고 또 그것이 곧 전쟁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장수왕은 마음씨가 곱고 천성이 어질어 사람의 죄를 보고도 오히려 사랑으로 교회(敎悔)하는 사람이니 설사 우리가 진다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일시에 대군을 거느리고 구살라국을 쳐들어갔다. 

그러나 워낙 단결이 굳은 구살라군은 처음에는 약간 쫓겨가는 듯하였으나 마침내 그들은 가사군을 역습하여 범예왕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원래 자비심이 많은 장수장인지라 무참하게도 학살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네가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번만은 용서해 줄터이니 다시는 이런 일을 범하지 말라. 땅이 많아졌다고 그대의 배가 더 불러지고, 재산이 더 높아진다고 그대의 이름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 먹는 것같이, 그대 입는 것같이 그대 사는 것같이 모든 백성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라. 그리하면 그대는 결국 죽지 않으리라."

그러나 간악한 범예왕은 이 간절한 장수왕의 인혜(仁惠)에도 불구하고 얼마 아니되어 또 군대를 몰고 구살라국을 쳐들어왔다. 

장수왕은 생각했다. "나는 이미 범예왕을 이기고 있다. 그러므로 저들의 습격에는 조금도 개의할 필요가 없다. 범예가 바라는 것은 이 땅과 재산이다"

이렇게 해서 장수왕은 수색의 대상이 된지 십수년, 하루는 길가 나무 밑에 앉아 음율을 고르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와 곁에 앉았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 길손입니까?" "예, 저는 저 머나먼 나라에서 장수왕의 높은 이름을 듣고 왔는데 왕은 간 곳이 없고 폭군이 노략하여 가겼던 재산은 다 빼앗기고 이렇게 거지가 되어 돌아다닙니다." 범예왕은 지금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장장한 상금을 걸고 탐색하고 있습니다.만일 당신이 나를 인도하여 범예왕의 처소에 이르게 된다면 당신은 금후 그로 인하여 편히 살 수 있게 될것입니다."

"대왕님, 꿈에라도 그런 말씀을 마십시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바로 대왕님입니다. 저는 아직 젊고 대왕님은 이미 늙었습니다.  이제 제가 밭을 빌어 생을 이어가도록 할 터이니 대왕님께서는 편히앉아 계십시오." "아니오. 당신은 사람의 명이 때가 있음을 알지 못하십니다. 아무리 단 것을 먹여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부드러운 옷을 입혀 사람이 기를지라도 명은 마침내 마침이 있습니다. 나의 명은 당신이 아니라도 며칠가지 못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죽어 썩는 송장이 되기보다는 황금의 일토배가 되는 것이 낫지가 않겠습니까?"

"여보시오, 도사(導師)님. 만일 당신이 이렇게 소란을 피운다면 좋은 씨앗이 맺기 전에 무서운 풍운이 내릴까 두렵습니다. 어서 울음을 그치고 나를 인도하시오." 

이렇게 해서 왕은 걸인의 손목을 잡고 범예왕 앞에 인도되었다. 

범예왕은 살기에 찬 눈빛으로 장수왕을 바라보면서 "내 오늘에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자게 되었다. 참으로 착하다, 거리의 천사여. 내 너에게 평생을 먹고 살 상금을 줄터이니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향락하라."천사는 주먹 같을 눈물을 발에 떨구면서 장수왕의 발에 엎드려 정례했다.범예왕은 곧 군신에게 명령하여 장수왕을 결박하고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조리를 돌리게 했다. "내가 나라를 빼앗긴 자입니다. 임금님의 마음을 괴롭게 한 자입니다." 이런 프랑 카드를 가슴에 붙이고 그 때 장수왕의 아들 장생태자는 외국에 들어가 비밀히 양육되어 나이 17세에 이르렀고 그동안 무용을 익혀 지혜가 뛰어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나라를 사모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은 날로 강해져서 견디다 못해 몇몇 부하를 이끌고 구살라국에 밀입하여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 때 장수왕이 어떤 천사의 무고로 범예왕에게 붙들려 조리를 돌리고 마침내 사형에 임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눈에서 무서운 불길이 솟아올랐다. "범예왕 이놈, 두고 보자. 결코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리라."  장수왕은 "네가 진정 내 아들이라면 후에라도 그런 일일랑 생각하지 말라. 만일 내가 죽은 뒤에라도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이렇게 간절히, 그는 그의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슬프게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태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시중에 숨어 아버지와 같이 학문에만 열중하면서 틈틈이 아름다운 기악으로 시민들의 거치러진 마음을 달래주곤 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바라나시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이름은 범예왕에게 까지 알려지게 되어 궁중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과연 그는 인물이 출중할 뿐 아니라 말과 행위가 뛰어나 범예왕은 그를 항상 그의 좌우에 앉히고 두터운 신임을 하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지나가는 동안 태자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지고 임금님의 사랑은 가면 갈수록 짙어갔다. 하루는 범예왕이, "내일은 사냥 갈 터이니 모든 준비를 단단히 하라." 하였다. 태자는 비로소 복수의 기회가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칼과 창, 살을 다듬었다. 이튿날

장생태자는 범예왕을 모시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모든 군신들이 이르지 못하는 곳까지 산짐승들을 몰고 들어갔다. 종일토록 한적한 산 험한 골짜기를 달리고 쏘고 또 달려 피곤한 법예왕은 어느 호숫가 반석위에 이르러 장생태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다. 태자는 이때다 하고 부르르 떨면서 옆에 찼던 칼을 빼어들었다. 오랫동안 숨어 있던 복수심이 불꽃처럼 피어오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고이 잠들어 있는 대왕을 들여다볼 때, 펄펄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태연하게 숨을 거두어 가신 아버지 장수왕이 눈앞에 떠올랐다. 

"잘 참으라. 잘 견디라. 이것만이 이기는 길이다." 마지막 부탁하신 그 말씀, 차마 그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빼었던 칼을 칼집에 넣고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깊이 잠이 들었던 범예왕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잠에서 깨어나면서 말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내 지금 잠 속에서 장생태자를 보았는데 그가 푸른 칼을 들고 나를 쫓아오는 꿈을 꾸었다." 그 때 태자는 무릅을 끓고, 목을 내밀었다. "용서합시오, 대왕님. 제가 바로 장생태자입니다. 죽여주십시오, 대왕님." "응, 그대가 장생태자라고―" 

대왕은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신하 그대가 바로 장생태자라니,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농담을 하지 말라." "아닙니다. 대왕님, 제가 정말 장생태자입니다." 

하고 그동안 내력을 소상히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방금 큰 칼을 빼어들고 복수하려 하였던 것까지도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그러니 대왕님, 대왕님은 이제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나의 복수심은 아버지의 유계(遺誡)앞에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어서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두 다리를 쪽 뻗고 주무십시오.대왕은 말을 들고 감격한 나머지 옛일을 회고했다. 
자기의 끊임없는 간탐과 잔인무도한 심사가 참으로 부끄러워 참회심이 복받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 태자여.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나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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