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저마다 신기한 모습들을 뽐내고~

인왕산은 거대한 바위산이다. 커다란 화강암이 듬직하게 솟아올라 만든 주봉의 암반은 당당한 위풍을 뽐내고, 그 주변과 계곡에 박힌 크고 작은 바위들은 모두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모양새에 따라 선바위 말바위 매바위 삿갓바위 부처바위 맷돌바위 기차바위 치마바위 조바위 차바위 범바위 이슬바위 모자바위 지렁이바위 등 등 동물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저마다 신기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

이런 바위들은 암석숭배 혹은 바위 정령을 믿는 우리의 민속신앙적 성향으로 보아 인왕산을 민간신앙의 중심터로 여기도록 만드는 조건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인왕산에는 바위들이 많고, 많은 그 하나하나에 이름이 지어지게 된 사연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인왕산 선바위는 마치 남녀가 같이 서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자연의 조화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조각가가 돌을 깎아 세운듯한 느낌을 준다. 오묘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선바위가 전국에 걸쳐 꽤 여러 군데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땅속에 깊숙이 박힌 자세로 서있는 입석(立石)은 남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선바위에는 멀리 선사시대로부터 아들 낳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기자(祈子)신앙의 대상물이 되어 왔다.
 
안내판에는 선바위의 ‘선’을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로 불렀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바위가 참선 중인 무학 대사를 상징한다는 설도 있다. 서있는 바위라는 뜻에서 선바위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볼 때 참선 선자 운운은 맞지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선바위를 놓고 무학 대사가 이성계에게 건의한 것이 있는데, 오래되어서 전설로 취급하지만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도읍지를 정할 때 이성계는 무학 대사와 함께 서울을 둘러싼 산 지형 지물을 살폈으며, 대궐 터를 앉힐 뒷산인 인왕산은 특히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속속들이 살펴보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선바위가 두 사람의 눈에 안 띠었을 리가 없다. 선바위를 자세히 살핀 무학 대사는 이성계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이 바위를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조선이 번성화고 평안할 것이 옵니다.”
 
무학 대사는 대궐의 뒷산에 있는 남근석을 품으면 단순히 자손의 번성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조선이 번성하고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무학 대사가 불교의 번성을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곡해 하였다.
이성계는 성을 축조할 때 유학자들의 주장을 ?아 지금처럼 선바위를 성의 밖으로 놓이게 만들었다. 서울은 가히 일국의 수도로 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러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성계의 서울 선택은 최상이었지만 몇 가지 풍수지리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놓친 것이 있어 인진왜란같은 환란을 당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풍요를 갖다 줄 수 있는 석신(石神)을 성곽 안으로 품지 않고 밖으로 내친 것은 잘못된 결정인지도 모른다.
 
인왕산 선바위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 이때 대개 촛불을 밝혀놓고 과일을 올린다음 바위에게 절을 올리는 식으로 소원을 빈다. 거의 아들 낳기를 바래서 찾아온 사람들이지만 기자속(祈子俗)이 전부는 아니다. 가정의 평안과 사업번창을 기원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끼고 안산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남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선바위가 또 하나 있다. 골짜기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에 선바위가 두 개가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안산의 선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혈(性穴)이 패어 있는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돌멩이를 갖고 서로 부벼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 추축된다. 그리고 이 바위 밑에 둥글게 홈이 파인 바위가 있는데 이 작은 바위가 남근석과 짝을 맞춘 여자를 상징하는 돌이다.

한편 지난 1998년 서울시에서는 시 캐릭터로 왕범이를 확정한 바 있다. 인왕산의 ‘왕’과 호랑이의 우리말인 ‘범’을 결합시켜 ‘인왕산 호랑이’를 뜻하는 이름의 왕범이를 만든 것이다. 경복궁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은 전체적인 산세를 볼 때 흡사 호랑이가 웅크린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왕산하면 흔히 호랑이를 떠올리고, 인왕산에는 화랑이와 읽힌 전설이 유독 많은 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인왕산 일대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난동을 부렸었다.

경복궁 내정이나 창덕궁 후원에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경기도 고양 등지의 민가에 까지 침입하여 사람을 물어갈 정도였다. 문헌에는 그 피해인원이 수백 명에 달하였고, 조정에서는 군대를 출동시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벌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사실 인왕산 호랑이라고 불린 호랑이들이 진짜 인왕산에 상주하며 살던 것들인지 백두산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 남하했다가 인왕산 근처에서 사람들의 눈에 띤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호랑이는 백두산에서 인왕산까지 하루 저녁에 일곱 번 반을 오갈 정도의 주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날아다니는 호랑이를 비호(飛虎)라고 한다. 비호의 종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라면 어느 놈이나 비호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인왕산에 출몰한 호랑이가 인왕산에 붓밖이로 살던 호랑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인왕산 고개 이름이 무악재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 하였고 재를 넘으려면 여러 사람이 모여야 비로소 넘어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모아재'라고 부르다가 그것이 변해서 오늘날의 무악재가 되었다. 그러니 호랑이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셈이다.
 
인왕산과 얽힌 호랑이 전설 중에는 포악한 호랑이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옛적에 인왕산에 호랑이 부부가 한 쌍 살고 있었다. 호랑이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았고, 그들은 사람들을 보면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가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악재를 넘나들며,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지만, 행실이 못된 사람이 고개를 넘을라 치면 어김없이 해코지를 하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왕산에 산불이 발생했다. 이때 암컷이 먹을 것을 찾아 인가로 내려갔다가 포수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수컷이 포효하며 슬프게 울부짖다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으로 아내의 뒤를 따랐다. 이때 바위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그 모양이 마치 자살한 수컷 호랑이처럼 생겼고, 해가 중천에 뜨면 이 바위에 반사된 햇빛이 마치 호랑이 눈에서 나는 광채와 같았다. 암컷을 쏘아죽인 포수는 이 빛에 두 눈이 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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