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시절, 서울 장승배기에 사신다는 아가씨의 할아버님댁을 성화에 못 이겨 방문했다. 옛 경기도지사 관사였다는 집이다. 돌층계에 올라서서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꽤 넓은 앞마당에 한반도 모양의 연못과 잘 다듬어진 정원이 눈에 번쩍 띈다. 벽면이 빽빽하게 책으로 둘러쳐진 안방에는 손때가 묻어 짙은 밤색이 된 낡은 탁자 하나만 달랑 놓여있다.

둘이서 나란히 엎드려 큰절을 올리니, 흐뭇한 표정으로 첫 말씀을 떼셨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짝 든 군기로 짧고 크게 즉답했다.
“네, P 고등학굡니다.”
할아버님께서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며 거듭 물으셨다.
“대학 말일세.”
“네, 대-학교는 못 갔습니다.”

집안 사정이 어렵게 돼 졸업하기 전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호적까지 고쳤다는 둥 주저리주저리 그럴싸한 변명으로 둘러댔다. 제대 후 대기업 5급 사무직으로 당당히 취업했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할아버님께서는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충분히 이해하겠다면서 손수 번역하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라는 책에 사인까지 하시어 필자에게 건네시며 간곡하게 당부하셨다.

“나쁜 학교는 없네. 일하며 배울 ××대, 방송대도 있다네.

마침 그때는 요즘처럼 입학 기간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즉시 모교인 P 고등학교 행정실에서 성적증명서를 떼서 학사과정에 지원서를 척 접수했다. 여차여차하다 보니 3학년이 됐다. 필자는 1학년 때부터 학업보다는 모임활동에 치중했던 터라 과대표도 맡았다. 출석수업 때는 경기지역 학우들을 위한 도시락까지 단체로 주문해 공수했다. 앨범 속에 끼워져 누렇게 변색한 그 당시 학보를 보니 객기가 하늘을 찔렀던 젊은 날에 헛웃음이 절로 난다.

주경야독하는 사람들은 뜻밖에도 많았다. 이따금 관공서나 기업체에 방문하면 필자가 잘 몰라봐도 그들이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해서 고향을 떠나 천리타향 부산으로 직장이 옮겨졌다. 그 사이에 동급생들은 졸업하여 좀 더 공부하겠다며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소식도 간간이 전해졌다. 열정이 불탔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시집살이시키는 시어머니보다도 무섭다는 수험생을 둔 부모님들, 고민 참 많을 줄로 안다. 세상까지 시끄러워 눈치작전 펼 겨를도 없다. 수능을 마치고 자신들의 걱정도 많을 텐데 이처럼 나라 걱정까지 하며 광장으로 나오는 수험생들에게는 어른이라는 우리가 미안스럽다. 요즘 잘 배웠다는 사람들, 뒤끝이 별로다. 학교를 탓할 이유는 없다. 할아버님 말씀 말마따나 세상에 나쁜 대학은 없다. 또한, 나쁜 나라도 없다. 나뿐이라는 돼먹지 않은 생각이 지나쳐 사달이 난 것이다.

병신년도 이젠 끝장이다. 정유년이 코앞으로 다가섰다. 보일 듯 말듯 열린 창틈으로 새는 바람에 365개의 촛불이 부르르 몸을 떤다. 오늘부터는 바깥에서가 아니라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분위기 살리는 데 촛불이 환하게 켜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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